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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rsus flags


버수스는 2008년부터 2017까지 갤러리 팩토리를 통해 발행된 비정기 간행물로 그간 다양한 주제 아래 문학, 음악, 영화, 전시기획, 실험음악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필진으로 참여했다. 박선민은 이 잡지의 기획과 아트디렉팅을 맡아 각 호와 관계된 이미지를 생산하였다. 책이란 매체의 형식적인 좌우 구조를 기본으로 해서 좌우 이미지의 대비와 내용적으로는 이미지와 텍스트의 낯선 대비를 통해 양극단 사이의 다양한 거리와 상황들을 실험했다. 이 잡지의 내용적인 기획은 박선민의 신문으로 만든 시 작업의 후속적 실험으로 주제적으로 관계성이 없는 이미지와 텍스트를 책의 구조안에 매칭시킴으로 독자들에게 자신만의 해석을 유도하였다. 매 호의 이미지의 주제는 그 당시 박선민이 천착한 작업의 주제와 연결되어 다른 방식으로 잡지 안에서 보여줘왔으며, 십년간의 사진 아카이빙안에서 다시 새로운 이미지의 맥락을 발견하여 책의 공간이 아닌 현실 공간안에서 재해석하려고 한다. 이런 시도의 하나로 10권의 표지 이미지로 ‘버수스(versus)’라는 이름에 맞게 짝을 이루어 바람에 펄럭이며 또 다른 의미를 획득한다.


2019 국립현대미술관 창동 레지던시 커미션 작업

사진; 전병철


버수스(versus): 결정으로서의 예술


전예완(미학자)



‘버수스(versus)’는 박선민의 아트디렉팅 하에 간행되었던 무크지의 이름이다.1) 기획의 변(辯)에 따르면 이 잡지는 ‘미묘한 양면성을 지닌 하나, 혹은 모든 둘 사이에 존재하는 팽팽한 관계’를 드러내고자 한다. 마주보는 양쪽 페이지를 통해 내용과 편집의 버수스(versus)를 동시에 구사한 이 기획은, 대조적인 이미지 및 텍스트의 병치를 통해 ‘창의적 움직임의 계기’를 도모한다.

낯선 대상들을 생경하게 마주세워(versus) 새로운 시각의 가능성이 열리도록 만드는 방법은 박선민의 초기작에서부터 지속적으로 사용되었다. 동일한 크기를 지닌 달팽이와 당나귀의 조우(<크로넨부르크 시리즈>(1999)), 이미지 및 텍스트의 탈맥락화-재맥락화(<신문詩>(2001~2013)), 탁구/골프/당구/테니스/야구/페탕크/볼링 등 서로 다른 규칙의 놀이공들의 포치(布置)(<balls>(2004)), 식물 이미지와 문자 기호의 매치(<식물 암호>(2006)), 가림막 또는 그림자 틈새기로 새어드는 빛(<daystar 시리즈>(2011)), 질주와 멈춤의 번복을 통한 시공간의 대비(<고속도로 기하학2>(2015)), 장님물고기가 유영하는 어항과 일월(日月)의 영상 그리고 음악의 대위법적 인스톨레이션(<waltz>(2015)) 등등……. 최근의 영상 작업인<버섯의 건축>(2018)에서는 숲속 부엽토에서 솟아난 취약하고 덧없는 버섯 이미지에, 장대함과 영속성을 추구하는 건축 이념의 나레이션을 입히기도 했다. 이렇듯 대조적인 것을 병립시켜 관념과 지각 사이에 틈을 벌리는 ‘버수스(versus)’야말로 박선민의 오랜 방법론이다. 그러나 박선민에게 ‘버수스(versus)’는 방법론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박선민에게 대상들 사이의 버수스(versus)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나와 대상 간의 버수스(versus)이다: ‘버수스(versus)’는 실로 박선민의 모든 작업의 기저에 있는 근원적 내용에 해당한다.

<versus> 5호의 이미지 테마가 ‘결정 vs. 결정’이었습니다. 첫 번째 결정은 크리스탈,광물, 자연이 만든 자연적인 형태이고 뒤의 결정은 decision입니다. (…) decision은 바로 제가 하는 작업의 행위를 결정하는, 어떤 것을 그리다가 멈추는 것, 무언가를 하려고 결정하는 것, 어떻게 보면 예술에 관한, 예술의 태도, 예술의 행위 같은 것입니다.”(박선민, 윌링앤딜링 인터뷰, 2015. 10. 17.)

작가는 자신의 작업을 정확하게 알고 있다. 어디선가 멈추기, 멈춰 서서 마주하기(versus) - 그것이 예술적 결정(decision)이다. 이 결정은 순식간에 일어나는 듯하지만, 대상에 초점을 맞추는 과정을 필연적으로 포함한다. 이 과정은 결코 주관을 대상에 투사하는, 대상을 주관적으로 해석하는 작업이 아니다. 오히려 타자를 우연히 맞닥뜨렸을 때 나의 조리개를 돌려 타자에 초점을 맞추는 과정이다. 매체를 다루는 기술이 예술가의 필수 덕목이던 시대가 훌쩍 지나버린 오늘날, 이러한 ‘나의 결정’은 그 자체로 예술 행위가 된다. 렌즈들을 연결해 매달아 놓은 작품 <눈(eyes)>(2015)에서 암시되듯, 박선민에게서는 내가 곧 렌즈이자 매체이며 예술적 창조란 어디선가 멈추어 초점을 맞추는 일일 뿐이다. 나의 우연한 결정(decision)으로 타자와의 관계가 결정(crystallization)되는 그 과정, 박선민의 모든 작업은 이 예술적 창조 과정 자체에 대한 이야기로 환원될 수 있다. 그의 작업들은 물론 각각 표면적으로 다양한 이슈를 담고 있지만, 모든 작품의 근저에는 언제나 예술의 본질과 예술가의 실존에 관한 물음이 흐르고 있다.

‘버수스(versus)’의 또 한 가지 함의는, 내가 타자를 ‘마주할’ 뿐 결코 타자와 하나 될 수 없다는 것이다. 타자는 영원히 타자이다: 나와 타자 간 진정한 소통의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나 vs. 타자’라는 간극 앞에서 홀로 ‘결정’을 내려야 하는 것이 우리 실존의 조건이자 한계이다. 박선민은 이러한 소통의 부재 혹은 괴리에서 야기되는 고통을 말하지 않으며, 그렇다고 주관적 소통의 유희를 즐기지도 않는다. 그는 그저 소통을 만들어가는 정답 없는 지난한 과정에 대해 묵묵히 이야기한다. 이는 비극적 실존이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기에 초점이 맺히는 모든 순간은 대체불가능하며 숭고하다. 박선민의 작업은 그가 마주한 것, 그가 결정한 것, 그가 초점을 맞춘 것이자 동시에 그가 놓친 것에 대한 증거이며, 따라서 그의 작업에서 예술과 삶은 동의어이다. 박선민의 2019년 하반기 창동 오픈스튜디오 출품작들 역시 ‘버수스(versus)’와 직결되어 있다. 콘크리트를 흩뿌려 마감한 외벽 사진 이미지들이 찢기고 중첩되어 붉고 검은 배경과 마주치는 콜라주 작업 <구체적 풍경1>(2019)에서는, 익숙한 방법론으로서의 버수스(versus)가 관객 저마다의 새로운 시각 형성을 자극한다. <S의 순서없이 꼬이고 뒤집힌 시간>(2019)은 박선민 작업의 근원적 내용으로서 ‘버수스(versus)’의 진화를 보여준다. ‘줄(rope)’은 고래로 인연, 운명, 속박이자 길안내의 상징이었다. 박선민은 시간의 결절을 지닌 로프들을 얽히고설키게 배치하여 선형적으로 흐르는 듯 보이는 시간 관계를 재편성한다. 우리의 삶은 매순간 구체적 경험 속에서 특정 과거 혹은 미래와 맞닥뜨리면서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선회하고, 그 와중에 시간 축에 얽힌 수많은 관계들은 새로운 버수스(versus)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맺을 것이다.

1) 박선민은 <versus no.1>(2008)부터 <versus no.9>(2016)까지, 9년간 총 9권의 아트디렉팅을 맡았다. <versus>는 2017년 제10호를 끝으로 폐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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